본문 바로가기

세상 별의별 이야기

6.25 전쟁에서 우리가 중공군에 밀린 진짜 이유!!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

 

패전의 역사를 잘 가르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6.25 전쟁을 예로봐도 가르치는 것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패하였다."라는것으로 교육을 하고

 

이것을 사실로 믿고 삽니다.

 

그래서 국민들 중에 6.25 전쟁에서 왜 연합군이

 

북한 지역에서 중공군에게 패퇴 당하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드물 겁니다.


6.25 전쟁의 전황을 결정적으로 가른

 

두 개의 큰 전투와 작전이 있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하나는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고,

 

또 하나는 바로 '청천강 전투(1950. 11)입니다.


청천강 전투 당시 유엔군을 공격하는 중국인민지원군 / 위키백과

 

청천강 전투에서

 

유엔군의 주력인 워커 장군의 미 8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1.4 후퇴 당시 남으로 피난하는 피난민들의 행렬 / 나무위키

 

1951년 1월 4일

 

연합군을 휴전선 이남으로 후퇴시킨

 

이른바 1.4 후퇴의 원인이 됩니다.

 


여기까지는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는 사람이 조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연합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원인

 

즉, 청천강 전투의 결정적인 패인이

 

한국군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집은 후

 

미 8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은

 

1950년 10월

 

서부전선에서 북한군을 신의주까지 몰아내게 됩니다.

 

압록강을 건너는 중공군 / 국가기록원

 

그런데 이때 중공군이 참전하게 되고 

 

신의주 아래 온정리라는 곳에서 처음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유엔 사령부는

 

연합군을 청천강 선으로 물리게 되며

 

방어를 위해 부대를 재정비하고 전선을 구축하게 됩니다.

 

1950년, 제8군 사령관 중장 월턴 워커 / 위키백과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

 

청천강 서부 지역에는 한국군 1사단, 미군 24사단, 제1 기갑사단 등을 배치하고

 

청천강 상류인 덕천군에는 한국군 7사단, 영원 군에는 한국군 8사단을

 

그리고 예비사단으로 한국군 6사단을 배치하였습니다.

 

1955년 새롭게 제정된 원수 군복을 입은  펑더화이 / 나무위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

 

위와 같은 연합군의 병력 배치를 전부 파악하고, 

 

전혀 주저함 없이 1950년 11월 24일

 

한국군이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덕천과 영원군을 공격하여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라는 내용과 함께 공격을 지시합니다.

 

사실 중국군 사령관 팽덕회는

 

출처: 루리웹

 

참전 이래로 한국군을 오합지졸로 평가하여 

 

주로 한국군이 방어하는 지역을 공략하는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6.25 전쟁 중 중국인민군이 국군포로들을 이송하는 장면 / 경향신문

 

그리하여 이 전투에서 한국군 7사단 및 8사단은

 

병력의 60%가 사망 또는 실종, 포로로 잡혔는데

 

심지어는 연대장 3명이 생포되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하는 등의 피해로 완전히 궤멸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이었던 것은

 

예비사단인 6사단을 이끌고 있던 한국군 2군단장은 

 

6사단이 중공군을 직접 조우하기 전까지

 

자신의 예하 사단인 7,8사단이 궤멸당한 사실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위와 같이 방어선의 우측이 무너짐에 따라

 

미군이 중공군에게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바

 

워커 중장은 한국군 2군단의 붕괴 소식을 접하고

 

      강추위 속에 유엔군들이 모포를 뒤집어쓰고 후퇴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미군 및 연합군에게 평양까지 후퇴를 지시하게 되는데

 

퇴각을 명할 시점에는 이미

 

중공군 38사단이 미군의 퇴로 차단에 나서게 됩니다.

 

이 중공군 38사단의 퇴로 차단에 맞서서

 

한국전쟁 참전 터키군

 

터키군 여단이 미군의 퇴로 확보에 나섰고

 

터키군이 용감하게 중공군을 차단하고 있는 기회를 이용해

 

미군은 겨우 평양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1950년 12월 23일에 군을 재정비하여

 

임진강, 한탄강에서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중공군 공세 중 설마리 전투에서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원들

 

중공군의 1951년 설날 공세를 막아내고 반격에 나선 연합군은 

 

1951년 봄에 휴전선 인근 지역까지 다시 전선을 밀어 올렸습니다.

 

6·25전쟁  와중에 부모를 잃은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 어린이를 업은 한국 육군의 아버지 밴플리트 장군

 

이 과정에서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워커 중장의 후임)은

 

새로 구성된 한국군 제3군단 (보병 3사단, 보병 9사단)을

 

강원도 인제군 현리 지역에 배치합니다.

 

1951년 중공군의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이때에도 팽덕회는

 

연합군의 약점으로 한국군을 지목하고

 

한국군의 방어지역 공격을 선택합니다.

 

1951년 5월 16일부터

 

한국군 제3군단 수비지역인 인제군 일원에

 

중공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는데

 

중공군의 1951년 5월 대규모 공세 직전 횡성에서 작전 기동 중인 미 해병대 장병들

 

이때의 전투를 현리 전투라고 합니다.

 

중공군은 한국군 주력을 우회하여

 

한국군의 퇴로부터 먼저 차단한 뒤 공세를 시작함으로써 

 

한국군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발생하자,

 

3군단장이 부군단장에 지휘권을 위임하고 부하들을 남겨 둔 채,

 

비행기를 타고 도주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3군단은 중공군에 포위된 채 궤멸되었고,

 

병력의 60%는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머지 생존 병력도 무기를 버리고

 

개인별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잡힌 국군 포로 중에

 

그 유명한 '조창호 소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43년만에 북한을 탈출한 첫 탈북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후에, 조창호 소위는 탈북하여 돌아온 뒤

 

지속적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당시 3 군단장에게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어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3군단장은 끝끝내 조창호 소위의 요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으로 상륙하여

 

연대장, 사단장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백전노장 밴플리트 장군은

 

이런 한국군의 지휘부를 보고 황당하고 대경실색하여,

 

 

맥아더 장군에게 연락해

 

한국군의 작전권을 빼앗아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연락하여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및 지휘를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으니,

 

지휘권을 연합군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고,

 

이에 이승만 대통령이

 

"장군의 요구대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적은 각서를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게 되는데

 

1950년 맥아더 장군에게 무공훈장 수여하는 이승만 대통령 / 국가기록원

 

이게 바로 간혹 문제가 되는 '작전통제권 이양'이며,

 

이 시점 이후 한국군은 자기 부대를 통솔만 할 뿐

 

작전도, 작전 지휘도 금지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잘 알지 못하는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전의 분수령이 된 위 청천강 전투를

 

패전으로 이끈 한국군 2군단장과 

 

현리 전투에서 도망친 한국군 제3 군단장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재흥'중장입니다.

 

유재흥 장군

 

유재흥 중장은 이렇게

 

한국 전사에 길이 남을

 

전설의 패전 2건의 주역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현리 전투 패전 이후,

 

밴플리트와 유재흥 사이에 설의 대화 내용이 있습니다.

 

2군단장 재직시절로 추정되는 시기의 유재흥 장군. 맨 왼쪽이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유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잘 모르겠습니다.........

 

밴플리트: 그럼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그런 것 같습니다........

 

밴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과 예하 2개 사단을 모두 해체하겠소.

 

귀관은 나와 함께 온 정일권 장군에게 전출 신고를 하도록 하시오."


그런데 이것은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더 놀라운 일은,

 

이런 짓을 했는데도 유재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는커녕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참모총장 대리까지 지내고 중장으로 예편했으며, 

 

유재흥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하자

 

유재흥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였습니다.

 

뒷줄 오른쪽이 박 대통령, 왼쪽이 유재흥 국방부장관


그러나 사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유재흥이 한국말을 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유재흥은 일본군 장교 유승렬(친일파로 분류)의 아들이었고, 

 

유승렬은 아들인 유재흥을

 

진정한 일본인으로 키우기 위해

 

한국말 사용을 금지해서

 

유재흥은 한국말을 할 줄 몰랐으며,

 

한국인임에도 한국인 통역관을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부친 유승렬(좌)과 아들 유재흥(우)이 함께 찍은 사진 

물론 유재흥도 일본 육사 출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였던 자이고,

 

친일파로 분류됩니다.


그러나 이 것마저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예비역 군 장성 72명이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습니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추진과 관련 역대 국방장관과 예비역 장성들의 반대 성명, 우측에 앉아 있는 유재흥 / 서울신문

즉,

 

자신의 황당한 짓거리로 빼앗긴 작전통제권의 환수를

 

본인이 다시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렇게 유재흥은 2011년에 사망하였고, 

 

더더욱 놀랍게도

 

현재 국립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는 유재흥 / 영남신문

우리나라는 정말 여러모로 놀라운 나라입니다.